2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질의에 답변하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국회방송(NATV) 유튜브 캡처]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저는 사실 두렵습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그냥 도입될 경우 외환시장에서 환율 변동성과 자본 유출이 걱정됩니다."
"개혁과 혁신은 필요하지만, 은행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외환 유출이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되는 것이 확인된 이후에 점차 확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밝힌 발언이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결제 효율성과 혁신에 기여할 것”이라며 도입 필요성을 제기하자, 이 총재는 “7가지 위험요인 중에서도 자본유출이 가장 걱정된다”고 신중론을 폈다.
그는 “현재 외국인 투자 유입보다 내국인의 해외투자가 4배 이상 많다”며 “경상수지가 사상 최대 흑자임에도 환율이 상승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면 외국인이 이를 사서 국내 재화를 구매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국내 자산가들이 해외로 자금을 이전하는 경로가 훨씬 쉬워질 수 있다”며 “외환당국 입장에선 환율 변동성과 자본유출이 가장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든다고 해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침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우리 통화정책이 아르헨티나나 튀르키예처럼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서둘러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혁신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은행 중심의 단계적 실험을 통해 통제 가능한 환경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신중했다.
김영진 의원이 디페깅 문제의 기술적 해결 가능성을 묻자, 이 총재는 “DLT(분산원장기술)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며 “기술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단언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 한국은행이 지목한 스테이블코인의 ‘7대 리스크’
이 총재의 발언은 단순한 우려 표명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최근 발간한 스테이블코인 보고서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러면 한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7대 리스크’를 지적했을까.
한은이 가장 먼저 꼽은 위험은 ‘디페깅(Depegging)’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통화에 1대1로 연동된다고 하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잦은 가격 변동이 발생한다.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당시 미국의 USDC는 1달러에서 0.88달러로 급락했고, 유로화 기반의 EURC 역시 1유로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한은은 이런 불안정성이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을 훼손해 스테이블코인 간 교환비율 차이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경제 전반의 가격 신호를 왜곡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두 번째는 ‘디지털 뱅크런’ 위험이다.
신뢰가 흔들릴 경우 이용자들은 모바일 클릭 몇 번으로 코인을 대량 환매할 수 있다. 이런 디지털 자금이탈은 초 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에 준비자산인 국채나 예금의 투매로 이어지고, 단기금리 급등 등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한은은 “은행의 뱅크런보다 훨씬 빠르고 전이 속도도 가파르다”고 경고했다.
세 번째는 ‘소비자 보호 공백’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이 발행하는 사적 자산으로, 예금자보호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1코인=1원’은 법적 보증이 아니라 발행사의 약속에 불과하다. 발행사 부도나 신용위험이 발생하면 투자자는 보호장치 없이 손실을 떠안게 된다. 한은은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의 역할을 수행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네 번째는 ‘금산분리 원칙 훼손’이다.
IT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할 경우 화폐 발행과 결제 기능이 한 기업의 플랫폼 안에 결합돼 독점적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이 경우 결제 생태계가 특정 대기업 플랫폼 안에 갇히며 중소상공인이나 이용자의 종속이 심화된다. 한은은 “금융과 산업의 분리를 전제로 한 기존 시스템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다섯 번째는 ‘자본유출 및 외환규제 우회’다.
한은이 가장 현실적인 리스크로 꼽은 부분이다. 스테이블코인은 퍼블릭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익명성이 높고, 국내에서 발행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돼 해외로 이동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 한은은 “이 같은 경로는 자본유출이나 외환규제 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실제 전 세계 불법 가상자산 거래의 63%가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통화주권 훼손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경고다.
여섯 번째는 ‘통화정책 약화’다.
스테이블코인은 중앙은행의 금리 조정과 무관하게 유통되며, 발행사가 단기국채를 대량 매입하거나 매도할 경우 시장금리 변동을 유발한다. 이 과정에서 기준금리의 정책 전달 경로가 왜곡되고, 금융환경의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 한은은 “정책금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물가안정 목표 달성이 어려워진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한은은 ‘금융중개 기능 약화’를 꼽았다.
예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하면 은행의 대출 여력이 줄고, 중소기업과 가계의 신용공급이 위축된다. 이는 자금조달비용 상승과 경기 둔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이 확대되면 전통 금융기관의 역할이 축소되고, 실물경제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은 “이들 리스크는 서로 연동돼 있으며, 한 축이 흔들리면 나머지도 빠르게 불안정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기술적 완성도보다 제도적 설계와 신뢰 확보가 우선돼야 하며, 스테이블코인은 혁신의 속도보다 신뢰의 구조를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은은 무리한 전면 도입보다 ‘단계적 실험’과 ‘제도권 중심의 관리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민간이 발행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보다, 은행 예금을 기반으로 한 ‘예금토큰(Tokenised Deposit)’ 모델이 보다 안전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판단이다.
예금토큰은 기존 금융 규제 틀 안에서 감독이 가능하면서도 블록체인 기반의 결제 효율성을 검증할 수 있는 구조다.
한은은 “은행 중심의 토큰화 결제망을 통해 외환 유출 등 금융안정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며, 향후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CBDC·예금토큰·스테이블코인이 병존 가능한 디지털 금융 인프라 모델을 단계적으로 검증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기대감에 플랫폼·핀테크주 동반 강세
이 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책 추진 기대감은 이미 금융시장에 반영됐다.
카카오페이를 비롯해 케이씨티, 한국정보인증, 다날, 아이티센글로벌 등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및 결제 관련 기업들은 한때 정책 기대감에 급등세를 보였다.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제도화 논의가 가속화되자 관련 테마가 금융·핀테크 업종 전반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는 단기 차익 실현과 기대감 선반영 부담으로 주가가 조정 국면에 들어선 모습이다.
일부 증권가는 “정책이 가시화될 경우 핀테크와 블록체인 결제 생태계가 함께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면서도, “최근의 변동성은 기대가 앞선 흐름을 되돌리는 과정으로, 제도 정비와 사업 실체가 구체화되지 않으면 추가 조정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economytribun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