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가 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가운데,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앞줄 가운데)을 비롯한 한국·일본 주요 상공회의소 회장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대한상공회의소]
[이코노미 트리뷴 = 이경철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자주 거론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25년 기준으로 국가별 명목 GDP(국내총생산) 세계 4위인 일본(4조2798억달러)과 세계 14위 한국(1조8583억달러)이 경제 분야에서 손을 잡으면 상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와 뿌리깊은 반일(反日)감정이 팽배한 가운데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최 회장이 일본과 경제 협력 기조를 크게 향상시키자는 제안은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아쉽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글로벌 관세전쟁으로 한국과 일본이 모두 타격을 입은 가운데 한일 양국이 경제 공동전선을 맺어 이에 따른 혜택이 많을 것으로 점치고 있다.
특히 양국이 협력 폭을 더욱 넓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등을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한국과 일본, EU 경제협력 모델 고민해야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제14회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 대한상공회의소]
9일 재계에 따르면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4회 한일 상의 회장단 회의’를 열었다.
한국과 일본 양국 상공회의소 회장단이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 일본 오사카 회의 이후 1년1개월 만이다.
이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은 한·일 양국의 ‘경제연대’ 대해 “일본 측에서도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상당히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은 단순한 협력을 넘어 이제 연대와 공조로 미래를 같이 설계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라며 “협력 아이디어를 직접 실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국과 일본이 유럽방식의 경제 통합 체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밝혀 눈길을 모았다.
최 회장은 “유럽연합(EU) 역사를 보면 (경제 통합의) 구체적 목표를 완전히 정해놓고 시작하지는 않았다”라며 “‘아예 통합하는 게 낫겠다’는 상태까지 조금씩 전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한국과 일본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그동안 한일 셔틀 외교가 복원되고 한일 정상 간 만남이 다섯 차례 이뤄졌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일 양국이 동반자 관계임을 확인했다"며 "두 나라가 단순한 협력을 넘어 연대와 공조를 통해 미래를 함께 설계해야 하는 공감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 ‘韓日판 셍겐 조약’ 만드나...에너지 공동구매 카드 ‘만지작’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왼쪽)과 고바야시 켄 일본상의 회장이 한일 경제협력 공동성명 서명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대한상공회의소]
이날 회의에서는 유럽 29개국이 단일국가처럼 입출국을 자유롭게 개방한 '셍겐 조약‘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솅겐조약은 27개 EU 회원국이 국경을 지날 때 비자나 여권 없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국경자유통과협정이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이 많은 외국 관광객을 받고 있지만 양국을 모두 방문하는 프로그램은 없다"라며 "양국 방문 관광상품을 만들어 한국과 일본을 모두 찾는 외국인이 많아지면 좋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882만명이 일본을 찾아 역대 방문 최대치를 기록했다“라며 ”일본은 한국을 두 번째로 가장 많이 방문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양국 협력 분위기를 이어가고 기업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결실을 맺으려면 경제계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이번 행사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에너지를 공동 구매하는 방안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에너지 공동 구매 방안에 대해 "에너지 종류와 구매 스케줄이 달라 얼마나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등의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라며 "어떤 시너지가 나오고 가격이 싸다든가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장점을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에너지를 공동 구매하면 이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은 일본과 △청정수소 △LNG(액화천연가스) 공동 구매와 탄소 포집·활용(CCUS) 등이 협력 가능한 분야”라며 “이를 통해 양국이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공동 구매에 따른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SK, 日 통신기업 NTT 차세대 통신 인프라 사업에 뛰어들 태세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왼쪽)과 이이 모토유키 NTT도코모 사장이 2022년 11월 서울에서 ICT·6G·미디어 분야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SK텔레콤]
최태원 회장이 이처럼 일본 러브콜을 잇따라 보내는 데에는 일본이 추진하는 차세대 통신 인프라 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통신기업 NTT의 차세대 통신 인프라 ‘아이온(IOWN)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아이온은 NTT, SK텔레콤, 소니, 인텔 등이 참여하는 차세대 통신 네트워크 다국적 프로젝트다. 이 사업은 데이터를 전기가 아닌 빛 형태로 전달해 속도를 높이고 전력 소모를 줄이는 획기적인 기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관련해 SK는 아이온 프로젝트에 참여해 새로운 반도체 개발을 진행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보다 빠른 속도로 광통신을 처리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메모리 반도체 개발이 필수”라며 “전자처리를 빛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반도체에 접목하면 차세대 반도체 판을 뒤흔드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광통신용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는 역할을 SK하이닉스가 추진하고 있으며 도쿄일렉트론 같은 일본 반도체 장비업계와 일본 낸드플래시업체 '키오시아' 등 AI(인공지능)와 반도체를 매개로 한 협업 가능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 트럼프가 포기한 자유무역 체계 한국과 일본이 이어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메이크 아메리카 웰시 어게인(Make America Wealthy Again)’ 행사에서 행정명령 문건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 백악관]
한일양국은 이번 행사에서 자유무역체제의 유지와 발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고바야시 켄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은 개회사에서 "자국 우선주의라는 조류가 강화되고 있지만 무역중심국인 일본과 한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자유무역체제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켄 회장은 또 "한일경제는 기존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와 알셉(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이라는 다자간경제협력체제를 중시하며 자유롭고 열린 국제경제질서를 지켜야 한다"라고 강조다.
CPTPP는 태평양에 인접한 국가들의 관세 철폐와 경제 통합을 목표로 한 FTA다. 미국이 2017년 1월 CPTPP의 전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해 지금까지 일본 등 11개국 중심으로 운영 중이다. 이에 따라 한국도 CP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또다른 FTA인 RCEP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과 동남아시아연합(아세안) 국가와 호주·뉴질랜드가 회원국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은 오래된 과거사는 물론 한국 법원의 일본제철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외교 마찰이 이어지면서 양국 갈등이 불거질 수 있는 요소가 많다”라며 “그러나 미국의 황당한 관세정책에 맞서 한국과 일본이 공동이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또 “또한 한국과 일본은 관세전쟁 외에 저출생·고령화, 지역소멸 등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도 수북이 쌓여 있다”라며 “양국이 불행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지만 과거가 현재 혹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양국 경제에 피해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이 CPTPP 등 경제 연대를 강화하면 양국의 경제 규모가 국제 사회에서 미국, EU, 중국에 이어 세계 4위 경제권이 될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쏘아올린 관세전쟁은 기존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모두 뒤집어 놓았다”라며 “이는 수출이 핵심인 한국과 일본 경제를 크게 훼손시킬 수 있는 악재”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제 국제무대에서 통상은 원칙이 아닌 생존과 직결된 사항”이라며 “한국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FTA를 체결했는데 일본은 예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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