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설파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 문득 떠오른다.
야성적 충동은 케인스가 1936년 발표한 저서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에서 등장했다.
야성적 충동은 새로운 기회를 발굴해 이에 도전하는 기업가정신의 요체다. 기업이 야성적 충동과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경기 침체의 높은 파고를 극복하기 위해 투자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정의선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이 국내에 무려 24조30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투자하는 기업가정신을 보여줘 이목을 모으고 있다.
1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올해 24조3000억원을 국내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2024년에 집행한 투자 금액 20조4000억원에서 3조9000억원(19%) 늘어난 규모다. 또한 현대차그룹이 연간 기준으로 지금껏 국내에 투자한 금액 가운데 가장 많다.
◇전기차 캐즘 해법-‘하이퍼캐스팅’ 첨단공법 눈길
투자 금액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구개발(R&D) 11조5000억원 △경상투자 12조원 △전략투자 8000억원이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R&D투자는 제품경쟁력 향상, 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수소 제품 및 원천기술 개발 등 미래 역량 확보에 투입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기자동차가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로 차량 수요가 크게 늘지 않아 하이브리드 자동차, 차세대 하이브리드 차량, 주행거리 연장형 자동차(EREV) 등으로 차량 수요 증가를 이끌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그렇다고 전기차 신모델 개발을 늦추는 것은 아니다”라며 “전기차 신모델 개발에 적극 나서 전동화 전환에도 속도를 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2030년 총 21개 모델의 전기차 라인업(제품군)을 구축하고 기아는 2027년까지 목적기반모빌리티(PBV)를 포함해 15개 모델의 전기차 라인업을 갖춘다.
SDV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2026년까지 차량용 고성능 전기·전자 아키텍처를 갖춘 SDV 페이스 카(Pace Car) 개발 프로젝트를 끝내 양산 차량에 적용할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은 이미 가동 중인 기아 광명 이보 플랜트에 이어 전기차(EV) 전용 공장 건설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셈”이라며 “2026년 상반기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인 현대차 울산 전기차 전용 공장은 초대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등을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현대차가 밝힌 올해 사업 계획 가운데 두드러진 대목이 ‘하이퍼캐스팅 공법’이다.
이는 전기차 생산 능력을 늘리기 위해 차체를 통째로 제조하는 신공법이다. 기존 차량은 수많은 금속 패널을 용접·조립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이에 비해 하이퍼캐스팅은 차체를 통째로 찍어내 공정을 줄여 생산성을 올려 품질 불량률을 대폭 낮출 수 있다.
미국 전기자동차 업체 테슬라도 하이퍼캐스팅과 유사한 ‘기가캐스팅 공법’을 활용해 생산 단가를 40%가량 낮췄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울산공장에 하이퍼캐스팅 공장을 새로 세울 예정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 ‘4각 파도’ 맞서기 위한 ‘경영 위기’ 대응책
현대차그룹이 이처럼 역대 최대 규모의 돈을 국내에 투자하기로 한 것은 최근 한국경제를 강타한 ‘4각 파도’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4각 파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앞으로 펼칠 정책인 이른바 ‘트럼프노믹스’를 비롯해 탄핵정국, 환율급등과 소비침체 등을 일컫는다.
탄핵정국이라는 정치적 불안정이 국내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이달 20일(현지시간) 취임을 앞두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환율이 1400원대를 이미 넘어서는 ‘고(高)환율 시대’에 진입했고 설상가상으로 내수 침체가 갈수록 길어지는 모습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야심찬 국내 투자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순”이라며 “국내에 대규모 투자해 현대차 ‘텃밭’인 국내 시장부터 챙기겠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차가 최근 10여년간 주력해온 글로벌 경영으로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이미 갖춘 상태”라며 “현재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거점으로 국내를 선택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이를 통해 국내를 그룹 혁신 본거지로 삼고 대규모 투자에 따른 채용 등 대기업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풀이했다.
현대차의 이러한 투자 배경은 최근 정의선 회장이 밝힌 대목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 6일 신년회에서 현 상황을 ‘퍼펙트 스톰(복합 위기’라고 진단하고 "비관주의에 빠져 수세적 자세로 혁신을 도외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 시장이 주춤한 상황에서 미래 성장 동력을 유지하려면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필수라는 얘기”라고 지목했다.
2024년 국내 완성차 업체 5개 사의 내수 판매는 135만8842대로 2023년과 비교해 6.4% 줄었다. 이는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14만5000대 이후 판매량이 가장 작은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두 형제 현대차는 지난해 내수 판매가 7.5%, 기아는 4.2% 줄었다”며 “이런 가운데 전기차 캐즘마저 겹쳐 잉 대한 해결책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이런 가운데 최근 소비 심리가 얼어붙어 자동차 판매 등 내수에 악영향을 주는 분위기”라고 강조했다.
◇첨단 차종 선보여 위기에 맞서...AI-자율주행 경쟁력 강화
현대차의 이러한 위기감은 R&D 투자 부분에서도 읽을 수 있다.
현대차의 올해 전체 투자액 가운데 R&D가 절반에 가까운 47%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이 이어지고 있지만 현대차는 주력 차종인 전기차 기술 경쟁력 강화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처지”라며 “이에 따라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에 힘을 실어 전기차 수요 차질에 따른 해법을 마련하겠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이는 전기차 고객수요 감소에 맞서 하이브리드차(HEV)와 EREV를 구원투수로 미래 자동차 경쟁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AI(인공지능)과 자율주행자동차 등 미래 먹거리 사업 강화에도 속도를 낸다.
업계 관계자는 “AI는 반도체 등 컴퓨터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활용범위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며 “현대차는 AI 기술을 활용해 차량의 첨단화와 자율주행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차의 이번 투자에 대해 재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국내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현대차의 이번 투자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마중물”이라며 “특히 트럼프 차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 등 해외 투자에만 주력하지 않고 국내에 과감한 투자를 한 점은 한국을 혁신 거점으로 삼겠다는 취지”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정의선 회장은 현대차·기아를 세계 3위 자동차업체로 키우는 등 ‘혁신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다”며 “현대차의 이번 투자 계획이 다른 기업에도 좋은 자극제가 돼 한국경제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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