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석유화학 업계 구조적 위기 대응을 위해 채권단 공동협약과 맞춤형 지원을 추진하며, 에틸렌 생산능력 25% 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을 본격화했다. [사진 = 한화그룹]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정부가 석유화학 업계의 구조적 위기 해결을 위해 채권금융기관과의 공동협약 추진에 나섰다.
업계의 자구노력을 전제로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에틸렌 생산능력을 최대 25% 줄이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21일 서울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석유화학 사업재편 금융권 간담회’에서 금융위원회는 채권금융기관 공동협약 추진 방침을 밝혔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홀로 걸어가면 얼음이 깨질 수 있다”며 “줄을 묶고 함께 건너면 정부가 손을 잡아주겠다”고 말했다.
협약 참여 기업에 대해서는 기존 여신 유지를 원칙으로 하되, 구체적인 조건은 기업과 채권금융기관 간 협의로 정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NICE신용평가가 산업 현황을,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사업재편 방향을 각각 발표했다.
정부와 업계는 나프타분해설비(NCC)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최대 370만톤, 국내 전체의 약 25% 수준까지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감축 규모와 속도는 각 기업이 제출하는 사업재편안에 따라 달라지며, 정부는 세제·금융·연구개발·규제완화 등 맞춤형 지원 패키지를 연계할 계획이다.
◇ 중국 증설 여파에 국내 가동률 70%대로 하락, 중동 저원가 공정까지 부담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는 2021년 이후 중국의 대규모 증설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NCC 가동률이 70%대로 떨어진 데서 비롯됐다.
가동률이 85% 이상 돼야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구조에서, 일부 공장은 손실 누적으로 가동 중단이나 매각에 직면했다.
여기에 중동의 저원가 통합 공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중동 국가는 원유에서 곧바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체계를 갖춰 나프타 정제 과정을 생략할 수 있고, 전력·열·유틸리티까지 단지 내에서 통합하여 운영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체계 덕분에 생산원가가 국내보다 크게 낮아, 아시아 NCC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됐다고 지적한다.
◇ 일본은 스페셜티로 전환, 한국은 범용 의존 심화…
업계에 따르면 일본은 범용제품과 스페셜티 제품 비중을 절반씩 맞추며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했지만, 우리나라는 범용제품 비중이 70%를 넘어 수익성 악화와 유동성 압박이 동시에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여천NCC는 2022년 이후 누적 적자가 불어나면서 한화와 DL케미칼(구 대림산업) 공동주주 간 시각차가 불거졌다. 범용제품 비중이 큰 한화는 공급망 유지를 위해 지원에 적극적이었으나, 스페셜티 전환을 진전시킨 DL케미칼은 지원에 신중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합작사 내부 갈등이 표면화된 배경 역시 이런 이해관계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특히, 여천NCC는 국내 에틸렌 생산량 3위 기업으로, 여수 석유화학단지 내 중소·중견기업에 원료를 공급해왔다.
전문가들은 만약 여천NCC가 무너졌다면 협력업체와 납품업체가 연쇄 타격을 입고, 지역경제 전반으로 충격이 확산됐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 이해관계 충돌 속 자율 구조조정 한계 드러나
다만 이번 정부 방안에 대해서는 한계도 제기된다.
업계 전문가들은 대기업부터 중소·중견기업까지 수십 개의 석유화학사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생산능력을 줄이라”는 지침만으로는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여천NCC 사례처럼 이해관계 충돌이 표면화된 만큼, 자율적 조정만으로는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행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정부가 원칙적으로 자율 구조조정을 내세우되, 비공식적 협상이나 조정 과정을 통해 이해관계자 간 교통정리를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조조정이 책임 회피로 흐르고 산업 재편의 적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요소수 대란 교훈…기초소재 의존 리스크 상기
전문가들은 또한 과거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2011년 국내 요소 생산이 중단된 데 이어 2021년 요소수 대란이 발생한 것처럼, 기초소재를 특정 국가에 의존할 경우 물류·농업·제조업 전반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석유화학은 플라스틱, 섬유, 고무, 전자 소재 등 제조업 전반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 산업”이라며, “전면 포기보다는 선별적 축소와 고도화를 통해 질서 있는 감산과 산업 재편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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