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아스 아드리안 국제통화기금(IMF) 통화·자본시장국 국장이 2025년 10월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GFSR)’ 발표 자리에서 “자산가격 과열과 비은행 금융기관의 확산이 복합적으로 금융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진 = IMF]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국제통화기금(IMF)이 전 세계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을 경고했다.
겉으로는 주가가 오르고 유동성이 넘쳐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자산 고평가와 투자 쏠림, 비은행 금융기관(NBFI)의 위험이 얽혀 있으며 작은 충격에도 시장 전체가 급속히 흔들릴 수 있다는 진단이다.
◇ ‘겉보기의 평온함’…IMF “유동성 착시 속에 안주하고 있다”
IMF는 14일 발표한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GFSR)’에서 현재 금융시장을 “겉보기에는 평온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지반이 흔들리고 있다(Shifting ground beneath the calm)”고 평가했다.
무역갈등, 지정학적 불확실성, 정부 부채 증가 등 하방 위험이 상존함에도 시장 참여자들이 이를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IMF는 이러한 현상이 시장 전반에 ‘위험 인식의 마비’를 불러오고 있다며, “겉으로는 변동성이 낮고 시장이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근본적 건전성이 강화된 결과가 아니라 ‘위험 인식이 마비된 상태’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머니마켓펀드(MMF) 자산은 7조3700억 달러로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MMF는 단기 국채나 환매조건부채권(RP)에 투자하는 ‘대기성 자금’ 성격의 펀드로, 투자자들이 시장 불안을 느낄 때 임시로 자금을 옮겨두는 대표적 유동성 저장고다.
그럼에도 MMF 자산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은, 시장이 “리스크는 크지만 수익은 아직 포기하지 못한 상태” — 즉 불안과 탐욕이 공존하는 심리를 보여준다고 IMF는 설명했다.
동시에 S&P500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유동성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IMF는 “대규모 유동성이 자산시장 전반을 떠받치고 있지만, 이는 작은 충격에도 급속히 흔들릴 수 있는 불안정한 균형”이라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최근의 평온함은 실질적 회복이 아니라, 위험자산으로 몰린 자금이 만들어낸 일시적 착시(Liquidity Illusion)에 가깝다”며 “이런 환경에서는 외부 충격이 발생할 경우, 투자 심리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자산 가격 조정이 급격하게 전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IMF 통화·자본시장 국장 토비아스 아드리안(Tobias Adrian) 도 “지금의 시장은 불확실성에도 평온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취약한 균형이 형성되고 있다”며 “이 균형이 깨질 경우, 신흥국 통화부터 글로벌 자산시장 전반으로 충격이 확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펀더멘털을 넘어선 밸류에이션…AI 낙관론이 만든 착시
IMF는 금융시장의 위험을 키우는 첫 번째 요인으로 자산의 고평가를 지적했다.
현재 글로벌 주식시장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 은 22.8배로, 최근 5년 평균(19.9배)과 10년 평균(18.6배)을 모두 웃돈다. 선행 PER은 현재 주가를 향후 12개월간 예상되는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값으로, 앞으로 벌어들일 이익 대비 주가가 얼마나 비싼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이는 투자자들이 기업의 펀더멘털, 즉 실질적인 이익과 재무 체력보다 미래 성장 기대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IMF는 “최근 자산 밸류에이션이 기업의 펀더멘털을 크게 상회하며 과열 국면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밸류에이션은 시장이 기업의 내재가치를 얼마나 고평가하거나 저평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평가 잣대다.
특히 인공지능(AI) 혁명에 대한 낙관론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성장 스토리’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IMF는 우려했다.
IMF는 “긍정적 내러티브가 시장을 지배하면, 복잡한 구조적 리스크가 가려질 수 있다”며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밸류에이션이 급격히 재조정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매그니피센트 7’이 지배하는 시장…“꼬리 위험 현실화 가능”
두 번째 취약성은 투자 집중도다.
S&P500 지수 내 상위 10개 종목의 시가총액 비중은 37.3%, 그중 ‘매그니피센트 7(Magnificent 7)’으로 불리는 기술주 7개사의 비중만 34%에 달한다.
IMF는 “시장이 소수 대형 기술주의 실적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며 “AI나 기술 혁신에 대한 기대 변화만으로도 주가 조정이 급격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IMF는 만약 M7 주가가 급락할 경우,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패시브 ETF(지수를 그대로 추종하는 펀드)들이 기계적으로 대량 매도에 나서면서 시장 전체의 급락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소수 기업의 변동성이 시장 전반으로 확산되는 ‘꼬리 위험(tail risk)’ 이 현실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보이지 않는 뇌관, ‘비은행 금융기관(NBFI)’의 급팽창
IMF가 특히 우려하는 부분은 비은행 금융기관(NBFI·Non-Bank Financial Institutions) 의 급격한 팽창이다.
비은행 금융기관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내주는 전통 은행은 아니지만, 사실상 자금을 중개하고 투자하는 역할을 하는 금융 주체다. 자산운용사·사모펀드·헤지펀드·보험사·MMF·증권사·캐피탈사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높은 수익을 위해 위험자산에 투자하면서도, 은행처럼 엄격한 규제를 받지 않는다.
IMF는 “이른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으로 불리는 NBFI 부문이 전 세계 금융 안정성의 새로운 취약지점이 됐다”고 지적했다.
2023년 기준 NBFI의 자산은 전 세계 금융자산의 49.1%를 차지하며, 은행 부문(3.3%)보다 훨씬 빠른 연평균 8.5%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유럽 투자펀드의 자산은 50조7000억 유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운용자산은 13조460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IMF는 “강화된 은행 규제를 피해 신용중개 기능이 NBFI로 이동했고, 그 결과 리스크의 중심이 은행 밖으로 옮겨갔다”고 분석했다.
◇ 은행과 얽힌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IMF는 비은행 금융기관의 부실이 단순히 해당 섹터에 그치지 않고, 기존 은행 시스템으로 전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유럽 은행들의 NBFI 노출은 자산 대비 약 10% 수준이며, 일부 은행의 경우엔 자본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노출도 관찰된다고 분석했다.
IMF가 전 세계 29개국 669개 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경기 악화 시 전체 은행 자산의 18%가 최소 자기자본비율(CET1 7% + 버퍼)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IMF는 비은행 금융기관(NBFI)에서 대규모 자금 인출이 발생하는 극단적 상황을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는 은행의 비중이 18%에서 최대 21%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보통주자본비율(CET1) 이 1%포인트 이상 하락하는 은행의 비중은 유럽에서 전체의 절반(자산 기준 39%), 미국에서는 12%로 나타났다. 미국의 해당 은행들은 전체 자산의 67%를 차지하는 대형 은행들로, 소수 대형은행이 집중적으로 취약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IMF는 “NBFI의 충격이 커질 경우 은행의 자본 건전성과 유동성이 동시에 흔들리며 대출이 위축되고, 실물경제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정부 부채의 압박…“통화·재정 엇박자 주의”
IMF는 금융 시스템의 불안이 각국 정부의 부채 확대와 맞물려 증폭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팬데믹 이후 각국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커지며 국채 발행이 급증했다. 시장에 풀린 국채 물량이 많아지면 채권 가격은 떨어지고, 이에 따라 장기 금리 상승 압력이 커진다.
IMF는 이런 금리 상승이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위험 프리미엄(텀 프리미엄·Term Premium)’ 의 확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텀 프리미엄은 투자자가 장기 국채를 보유할 때 미래의 인플레이션, 재정 건전성 악화 등 불확실성에 대비해 요구하는 추가 이자를 의미한다. 즉, 정부의 부채가 누적되면 투자자들은 재정 신뢰도 하락 위험을 반영해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하게 되고, 그만큼 장기 금리가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장기 금리 상승이 은행의 자본 건전성에도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은행들은 자산의 상당 부분을 국채 등 채권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이 떨어져 평가손실이 발생한다.
IMF는 보고서에서 “장기 금리가 3~5%포인트 상승할 경우 전 세계 은행의 핵심 자본비율(CET1)은 평균 1%포인트, 북미 은행은 최대 2.5%포인트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는 금리 상승으로 인해 은행의 완충 능력(자본 버퍼) 이 줄어들고, 금융 시스템의 충격 흡수력이 약화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정부의 재정정책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간 엇박자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지출을 늘리면(확장 재정),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하하더라도 시장은 국채 과잉 공급을 이유로 금리를 끌어올릴 수 있다.
IMF는 이런 정책 불균형이 지속될 경우, “국가 부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금융시장이 순식간에 냉각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한국, ‘글로벌 유동성의 수혜’와 ‘내부 취약성’이 맞물리다
IMF의 경고는 한국에도 직결된다.
한국 역시 글로벌 금융시장의 유동성 랠리 속에서 증시 상승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었다.
최근 코스피는 3,748.37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상승세의 중심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전기전자 대형주가 자리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호조와 달리, 한국 경제 내부에는 IMF가 지적한 구조적 취약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명목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89.7%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저축은행·증권사·캐피탈 등 비은행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도 빠르게 누적되고 있다.
올해 2분기 기준 부실 우려 사업장 관련 대출 및 보증 규모는 20조8000억 원에 달하고, 일부 저축은행의 PF 연체율은 10%를 넘어섰다.
글로벌 신용 경색이 현실화될 경우, 국내 비은행권의 자금 회수와 PF 부실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금융 시스템 전반을 뒤흔드는 ‘퍼펙트 스톰’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한국은 글로벌 자산시장 상승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IMF가 지적한 금융 취약성의 축소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IMF는 보고서를 통해 “비은행 금융기관의 위기는 은행 위기로, 은행 위기는 실물경제 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 시스템이 촘촘히 연결된 지금, 한쪽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IMF는 “현재의 평온함은 착시일 수 있다”며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을 조기에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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