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게임업체 넥슨이 무려 5조원에 이르는 상속세 납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넥슨그룹 총수 유정현 엔엑스씨(NXC) 의장 일가가 고(故) 김정주 창업자 별세 약 2년 반 만에 상속세 납부 절차를 2일 마쳤기 때문이다. 유정현 의장은 넥슨 공동창업자이자 김정주 창업자의 부인이다. 유 의장은 1994년 넥슨 창업 시절부터 남편을 도와 회사를 키웠다.
NXC 소속 관계자는 “자기주식 취득 거래와 와이즈키즈 자금 대여로 상속세 납부 절차가 끝난 것으로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NXC는 지난달 19일 유 의장 지분 6만1746주(3203억3800만원)와 자녀 김정민, 정윤씨로부터 각각 3만1771주(1648억2800만원)씩 자사주를 주당 518만8000원에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넥슨그룹 지주회사 NXC는 일본에 상장된 넥슨재팬을 자회사로, 게임 개발과 서비스를 담당하는 넥슨코리아를 손자회사로 두고 있다. 자금을 빌린 와이즈키즈는 유정현 의장이 두 딸이 지분을 각각 50% 보유한 유한책임회사다. 이 업체는 원래 넥슨 무선사업부가 분사해 설립된 곳으로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었다.
NXC 관계자는 또 상속세 조기 납부 이유를 묻자 "그룹 경영 안정을 최우선으로 한 상속인 일가의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김 창업자가 2022년 2월 타계하자 유 의장 등 유가족은 5조원이 넘는 상속세를 부과받았다. 이에 따라 유가족은 지난해 2월 NXC 지분 29.3%를 정부에 물납했다. 금액으로는 4조7000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물납한 지분 액수와 이번에 유 의장이 지분 매각·자금 대여로 확보한 금액을 합치면 전체 상속세 총액은 최소 5조3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루아침에 NXC 2대주주가 된 정부는 지난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지분을 매각하려고 했지만 공개 매각이 잇달아 유찰됐다. 또한 지난해 12월 두 번째 공개 매각에서는 입찰 참여자가 아예 없었다.
NXC 상속세 납부를 지켜보면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다. 쉽게 설명하면 NXC가 당장 거액의 상속세를 낼 수 없어 돈이 아닌 회사 지분을 대신 납부해 정부(기획재정부)가 NXC 2대 주주가 되는 황당한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상속세 5조원 납부 해프닝은 결국 터무니없는 상속세율이 원인이다.
애초 국내 상속세율이 낮았다면 NXC가 회사 지분이 아닌 돈으로 상속세를 납부했을 것이다. 정부도 지분 매각에 따른 번거로움을 피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나라 상속세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약탈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해외 주요국 상속세율을 살펴보면 프랑스 45%, 미국 40%, 독일 30% 등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 기간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입에 침 마르도록 치켜세웠던 북유럽 선진국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15개국은 심지어 상속세가 아예 없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상속세율이 60%가 넘는다. 세율만 따지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지분 100%를 물려받은 우리 기업인이 상속세 60%를 내면 지분이 40%로 줄어든다. 그다음 세대에서 남은 지분 40%에 또 한 번 60%의 상속세를 내면 최초 지분의 16%만 남는다. 한번 더해 기업이 3대째 상속하면 지분이 6.4%로 급감한다.
지분이 한 자릿수로 추락하면 회사 경영권은 벌처펀드 등 냉혹한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이 정도면 가업 승계를 하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밀폐용기 제조 국내 1위 기업 ‘락앤락’, 손톱깎이 생산 세계 1위 업체 ‘쓰리세븐’, 국내 1위 가구업체 한샘 등이 ‘약탈적 상속세’에 대대로 이어진 가업을 포기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업을 팔아치우는 신세가 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나라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상속세 폭탄’을 이기지 못해 2·3세 경영인이 가업으로 이어갈 회사 경영을 포기하고 시장에 회사를 매물로 내놓는 모습은 참담할 따름이다. 터무니없이 높은 상속세율에 애써 키운 기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정책을 쏟아내며 정부 당국은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100년 기업’ 타령만 되풀이하고 있다. 코미디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치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1776년 저서 '국부론(Wealth of Nations)‘에서 '세제는 예측할 수 있고 편익을 주며 효율적이어야 한다(taxation should be predictable, convenient, and efficient)'고 설파했지만 247년이 훨씬 지난 한국에는 마이동풍이다.
한국기업이 이해하기 힘든 상속세 폭탄을 맞아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주요 선진국에는 100년이 훨씬 넘은 장수기업이 차고 넘친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창업한 지 100년이 넘은 장수기업이 일본은 3만3000개, 미국은 1만9500개, 스웨덴 1만4000개, 독일4950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고작 7개에 그친다. 우리의 모습은 초라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기업 환경에서 1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장수기업의 출현은 박수받을 일이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역설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처럼 기업이 100년 이상 이어지려면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경영혁신을 일궈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국가 경제발전을 돕는 장수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 기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정부와 관련 당국이 충분한 자양분을 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정부와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다른 나라 기업 관련 조항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우리 기업에 불리한 갈라파고스 규제가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이를 없애는 게 상식이다. 징세 역시 감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전 세계가 기업에 각종 세제 혜택을 내놓으며 고용 창출과 국가 경제발전 주역이 되도록 격려하고 있지만 한국 조세 토양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이처럼 상속세율이 약탈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데에는 우리 사회 기층에 흐르고 있는 반기업 정서도 한몫한다. 혀를 내두를 만한 한국의 살인적 상속세가 성공한 기업을 증오하는 삐뚤어진 정서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가계, 정부와 함께 3대 경제 주체로 고용 창출 역할을 하는 기업을 저주하고 비난하는 치졸하고 옹졸한 ‘저주의 굿판’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물론 중견·중소기업 승계까지 막는 현행 상속세율이 이어진다면 국내 기업이 세계 최악의 세금을 피해 해외로 나가는 이른바 ‘코리아 엑소더스’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정부 당국이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상속세 폭탄을 떨어뜨린 채 기업에 고용 창출의 화수분이 되어 달라며 읊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계 흐름에 동떨어진 왜곡된 기업관으로 반기업 정서를 외치며 고용 창출과 100년 기업을 주문하는 모습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됐다.
우리 기업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아 투자·고용에 적극 나서도록 상속세율을 세계 평균 수준으로 낮추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그나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과도한 상속세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은 박수칠 만한 대목이다.
문제는 상속세율 인하를 ‘부자감세’의 프레임으로만 보고 있는 야당의 입장이다. 기업은 오너 자체에만 혜택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수 많은 직원을 고용해 이에 따른 경제적 창출 효과를 일궈내는 경제 주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기업을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18세기 사고방식으로는 100년이 넘는 기업을 키우기는커녕 갈수록 맥박이 약해지는 국내 경제호(號)에 활력을 불어넣기가 불가능하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 트리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