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 추진을 둘러싸고 주주환원 강화 효과와 기업 재무전략 제약 우려가 맞서고 있다. [사진 = PEXELS]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여권이 상법 개정의 다음 단계로 추진하는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를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주주환원 강화 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와 함께, 기업의 재무전략·경영권 방어 수단을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됐다.
자본시장연구원 황현영 연구위원은 발제에서 “자기 소각을 의무화하는 입법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면서도 “소각은 잉여현금을 주주에게 환원하고 경영진 사익 추구 가능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취득한 주식을 소각해야 하므로 현금흐름 부담이 커지고, 임직원 보상이나 인수·합병(M&A) 대가 등 다양한 재무 전략 활용이 제한된다”고 지적했다.
◇ 자기주식과 소각의 개념…취득 목적과 주주환원 방식의 차이
자기주식(자사주)은 기업이 자기 자금을 들여 다시 사들인 자사 주식을 뜻한다. 회계상 자산이 아니라 자본 차감 항목으로 처리되며, 의결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기업이 자기주식을 취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주가 저평가 신호를 통해 투자자 신뢰를 높이거나 △현금배당과 함께 주주에게 이익을 환원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인수·합병(M&A) 대가 지급, 임직원 스톡옵션 보상 등에서 재무 전략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미국·일본 등 주요 선국에서도 자기주식 취득은 보편적인 주주환원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자기주식을 취득한 순간에는 주식을 판 주주에게만 현금이 돌아가 ‘개별 주주 환원’ 효과에 그친다.
반면 소각은 발행주식 수 자체를 줄여 남아 있는 모든 주주의 지분율과 주당가치(EPS)를 높인다.
여권이 “소각을 통해서야 전체 주주에게 공평하게 환원 효과가 실현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 소각 의무화의 목적과 한계…주주환원 강화 vs 기업 유연성 축소
소각 의무화 추진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첫째는 단기적 주가 부양이다. 발행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높이고, 이를 통해 투자자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코스피 5000’ 달성이라는 정책 목표를 뒷받침하려는 구상이다.
일본이 ROE(자기자본이익률) 제고를 위해 자사주 소각을 확대했던 전례가 여권 내부에서 주요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둘째는 지배구조 개선 차원이다. 기업이 자기주식을 장기간 보유할 경우 △우호 지분에 넘겨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거나 △합병 비율을 조정해 승계에 동원하는 등 지배주주 편익 추구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다.
여권은 소각 의무화를 통해 이러한 활용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계도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경영계는 “이미 이사의 충실의무가 강화돼 불공정한 자기주식 처분을 결의할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된다”며 “소각 의무보다는 처분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제도가 더 합리적”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반도체·자동차처럼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한 수출 대기업은 경기 변동기에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주식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소각을 의무화할 경우 오히려 기업의 투자 여력 축소와 성장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 목적과 시장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경영권 방어의 현실적 쟁점…외국계 자본 견제 장치인가, 오너 일가 보호 수단인가
전문가들은 자기주식 제도의 또 다른 쟁점을 경영권 방어 수단에서 찾는다. 기업이 보유한 자기주식을 우리사주조합이나 우호 세력에 넘기는 방식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응하는 대표적 전략으로 활용돼 왔다.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이 오너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돕고, 소액주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합병이나 승계 과정에서 자기주식이 동원돼 주주 간 이해관계가 왜곡된 사례가 반복되면서 “사익 추구 도구”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 대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주체는 일반 주주나 국내 기관투자가가 아니다.
엘리엇(Elliott)과 같은 외국계 사모펀드나 글로벌 헤지펀드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삼성물산·현대차그룹 등 국내 대기업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자기주식을 활용한 경영권 방어를 단순히 “재벌 일가의 특권 유지”로만 보는 것은 현실을 간과한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단기 차익을 중시하는 외국계 자본의 압박이 장기적 투자와 고용 안정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주식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투기자본으로부터 경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이다.
◇ 단기 주가 부양보다 체질 개선이 우선
전문가들은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 논의가 주주환원 확대와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분배 방식의 문제일 뿐 기업가치를 높이는 정책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특히 한국 주식시장은 공매도가 기관 투자자에게만 허용된 구조적 불균형 속에서, 질적 성장 없이 외형적 주가 상승만을 목표로 할 경우 버블을 초래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정부와 국회가 상장 대기업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제도 개편에 치중하기보다는, 수출과 제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개선하고 중소·중견기업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 역량을 분산해야 한다는 제언도 제기된다.
단기적 주가 부양이 아닌, 코스피의 지속가능한 상승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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