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트리뷴 = 김 다니엘 기자] 한국 게임사 니트로 스튜디오와 넥슨이 공동으로 선보인 신작 ‘아크 레이더스(ARC Raiders)’가 스팀 글로벌 시장에서 예상 밖의 강세를 보이며 한국 게임 산업의 새로운 성장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크 레이더스는 전 세계 게이머를 겨냥한 글로벌 동시 출시 타이틀로, 출시 직후 스팀 상위권에 빠르게 진입하며 한국 개발 게임에서는 보기 드문 초반 파급력을 보여줬다.
특히 스팀의 ‘주간 최고 인기 게임(Weekly Top Sellers)’ 지표에서 10월 28일~11월 4일 기준 1위를 차지했고, 이어진 11월 4일~11월 11일 주간에서도 배틀그라운드(PUBG)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추출 슈터(Extraction Shooter)라는 비교적 마니악한 장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PC 게이머가 모이는 스팀 시장에서 연속 주간 1~2위를 지킨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다.
◇ 타르코프에 배틀그라운드 감각 더해…덕르코프 열풍까지 ‘하이브리드 흥행’
아크 레이더스 공식 플레이 영상. [사진 = 아크 레이더스 공식 유튜브]
아크 레이더스는 타르코프(Escape from Tarkov)류의 루팅·탈출 구조를 기반으로 하지만, 전투는 3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며 시야 확보·움직임·포지션 플레이가 강조돼 배틀그라운드를 연상시키는 교전 감각을 구현했다.
여기에 기계 병력과의 전투라는 강한 PVE 요소가 결합되면서 기존 추출 슈터보다 훨씬 대중적인 형태의 하이브리드가 완성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타르코프류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초심자·라이트 유저가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완충 장치를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크 레이더스는 플레이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퀘스트(미션) 시스템을 도입해, 초반 장비가 부족한 유저도 보상 중심의 진행 루프를 통해 게임 구조를 익히도록 설계했다.
아크 레이더스 스킬 트리 화면. [사진 = 아크 레이더스 공식 유튜브]
또한 아크 레이더스의 스킬 트리(Skill Tree) 구조 역시 진입장벽을 낮춘 요소로 평가된다.
레벨업을 통해 획득한 스킬 포인트를 투자하면 생존력 증가, 이동·회피 능력 향상, 장비 운용 효율 개선 등 다양한 능력을 단계적으로 해금할 수 있다.
이러한 ‘점진적 성장 구조’는 경험이 적은 유저라도 플레이를 반복할수록 난도가 완화되고 전투 생존력이 높아지는 흐름을 체감하게 만든다.
업계에서는 “스킬 트리가 장비 의존도를 낮추고 실력 격차를 완만하게 만들며, 실패하더라도 다음 판에서 성장 효과가 분명히 느껴지는 설계”라는 평가가 나온다.
결과적으로 아크 레이더스는 한국 게이머에게 가장 부담이 됐던 ‘사망 시 장비 손실’ 구조의 심리적 장벽을 크게 낮췄다.
최소 장비만으로 진행하는 ‘거지런’ 파밍이 가능하고, 장비 상실 부담이 줄어들면서 반복 진입이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전문가들은 “타르코프 장르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진입장벽을 절반 이하로 낮춘 설계”라고 분석한다.
'이스케이프 프롬 덕코프' 공식 스크린샷 [사진 = 스팀]
여기에 출시 전 국내에서 유행한 ‘덕르코프(Dollkorf)’ 열풍이 타르코프류 장르에 대한 사전 학습 효과를 제공했다는 분석도 있다.
‘덕르코프’는 정식 명칭 ‘이스케이프 프롬 덕코프(Escape from Duckov)’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하드코어 생존 슈팅 게임 ‘이스케이프 프롬 타르코프’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오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게임은 △ 탑다운 시점 △ 100% PVE △ 낮은 난도 △ 행성 탈출이라는 명확한 엔딩 구조를 갖춘 라이트 버전 타르코프로,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덕코프는 출시 나흘 만에 스팀·에픽게임즈 합산 판매량 50만 장을 돌파하며 국내 콘텐츠 플랫폼에서 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흥행을 두고 “덕르코프가 타르코프류 장르의 문턱을 크게 낮춰 시장을 데워놓았다면, 아크 레이더스는 이를 본격적인 대규모 추출 슈터로 끌어올린 케이스”라며 “라이트 유저층이 장르에 적응한 상태에서 아크 레이더스가 등장했기에 초기 순위 상승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 “Don't shoot”이 만든 새로운 재미…PvP보다 파밍 중심 유저가 다수
아크 레이더스의 상호작용 화면. [사진 = 아크 레이더스 인벤]
아크 레이더스의 화제성을 극대화한 요소로는 PVP 교전에서 발생하는 ‘Don't shoot(쏘지 마)’ 문화가 꼽힌다.
플레이어들이 서로 총을 겨누다 음성 채팅으로 협상을 시도하거나, 순간적으로 동맹을 맺었다가 전투 후 배신하는 등 인간적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콘텐츠로 흡수되면서 SNS·유튜브에서 밈처럼 확산됐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유저가 PVP 자체를 회피하고 파밍·탈출 중심의 플레이 방식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스팀 업적 통계에 따르면 ‘다른 플레이어 10명 처치’ 업적 달성률은 약 42.3% 수준이며, 단 한 명도 플레이어를 공격하지 않은 유저 비중도 19%에 달한다.
이는 절반 이상의 유저가 사실상 PVP보다는 파밍과 생존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는 △ 협상 △ 즉석 동맹 △ 배신 △ 공포심과 긴장감 같은 사회적 변수들을 게임 경험의 핵심으로 끌어올렸고, 추출 슈터 장르의 몰입도를 한층 강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P의 거짓 이어 확인된 글로벌 잠재력
아크 레이더스의 Queen. [사진 = 아크 레이더스 유튜브]
아크 레이더스 흥행은 한국 게임 산업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국내 게임 시장은 오랜 기간 모바일 MMORPG와 과금 중심 BM이 수익성을 이끄는 핵심 축이었지만, 과도한 현질 유도에 대한 피로감과 구조적 한계가 지속적으로 지적돼 왔다.
반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콘솔·PC 기반 대작은 개발 난도와 초기 비용, 실패 리스크가 높아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인식돼 왔다.
사실 한국 게임이 글로벌 무대에서 폭발적인 대흥행을 기록한 사례는 2017년 ‘배틀그라운드(PUBG)’ 이후 뚜렷하게 부재했다.
그동안 해외 시장을 뒤흔든 한국산 대작이 거의 없었고, 이 공백은 “한국 게임은 모바일·과금 중심 모델 외에는 경쟁력이 약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네오위즈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의 최지원 디렉터(왼쪽)와 차병준 아트실장이 ‘2025 대한민국게임대상’ 시상식에서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네오위즈]
그러나 2023년 ‘P의 거짓(Lies of P)’이 글로벌 시장에서 호평을 받으며 한국 개발사의 콘솔 대작 경쟁력이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이 흐름 속에서 이번 아크 레이더스의 흥행은 한국 게임이 과금 중심 구조를 넘어 글로벌 대작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제시한 사례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수익성만 놓고 보면 모바일 MMORPG가 여전히 우위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가치와 해외 팬덤이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며 “국내 개발사들도 장르와 플랫폼의 다변화를 본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국내외 게이머들 역시 과금 중심 게임 구조를 벗어나 완성도 기반의 새로운 시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도전이 장기적으로 한국 게임 산업 전체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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