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한국은행]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17일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을 넘기며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환율 상황을 두고 “위기라 할 수 있고 걱정이 심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다만 그는 “금융기관이 무너지고 국가 부도 위험이 있는 전통적인 금융위기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 총재의 발언은 최근 고환율 국면을 과거 외환위기와 동일선상에 놓는 시각을 경계하면서도, 현재 환율 수준이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는 점을 동시에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환율 상승이 곧바로 금융 시스템 붕괴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니지만,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가볍지 않다는 설명이다.

전통적 금융위기 가능성을 부인한 근거로 이 총재는 한국의 대외 건전성을 들었다.

그는 “우리나라는 현재 순대외채권국이기 때문에 원화가 절하되면 이익을 보는 분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순대외채권국은 해외에 보유한 외화자산이 외화부채보다 많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환율이 오를수록 외화자산의 원화 환산 가치도 함께 상승해, 외화부채 상환 부담이 국가 전체를 흔드는 구조로 번지기 어렵다.

한국은 2014년을 전후해 대외금융자산이 대외금융부채를 웃도는 순대외채권국으로 전환됐으며, 이후 대외 건전성이 구조적으로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외화부채 비중이 높았던 과거 외환위기 국면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뿐 아니라 201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은 외화자산보다 외화부채가 많은 순대외채무국 구조를 유지했고, 환율 상승은 곧바로 외화 상환 부담 확대와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당시에는 환율 상승 자체가 금융기관 부실과 국가 신용 위기로 직결되는 경로가 비교적 뚜렷했지만, 현재 한국은 순대외채권국으로 전환되며 구조적으로 그와 같은 취약성에서는 벗어났다는 것이 한국은행의 판단이다.

◇ 물가·분배 흔드는 고환율…한은, ‘수급 쏠림’ 경고하며 서학개미 책임론엔 선 그어

그럼에도 이 총재가 “걱정이 심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환율이 금융 안정이 아닌 물가와 분배 구조를 통해 경제 전반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환율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내부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 보는 사람이 극명히 나뉜다”며 “사회적 화합이 어려운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환율이 10% 오를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약 0.3%포인트 높아진다.

환율이 현재 수준을 내년까지 유지할 경우 물가상승률은 기존 전망치 2.1%를 웃도는 2.3% 안팎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수출기업과 외화자산 보유자는 환율 상승의 수혜를 입는 반면, 내수기업과 가계는 수입물가 상승과 실질 구매력 하락이라는 부담을 떠안게 되는 구조다.

또한 이 총재는 최근 환율 급등의 배경으로 외환 수급 쏠림 등 내부 요인을 거듭 언급했다.

그는 “미국 달러화가 안정되는데도 환율이 계속 오른 데에는 내부적 요인이 컸다”며 “불필요하게 올라간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변동성 관리뿐 아니라 환율 수준 자체에 대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구조적인 성장률 격차나 금리 차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같은 요인을 단기간에 해소하기 어려운 만큼, 정책 당국으로서는 단기 수급 요인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개인 해외투자 확대를 환율 상승 요인으로 언급한 데 대해서도 이 총재는 특정 집단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한미 간 성장률과 금리 격차, 주식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 구조적 요인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했다.

다만 환율에 단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수급 측면에서 개인 해외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점을 짚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이 총재의 문제의식은 투자 성과의 손익을 따지는 차원을 넘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미국 주식 투자가 일종의 트렌드나 ‘문화’처럼 확산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우려에 가까운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발언을 계기로 이른바 ‘서학개미 책임론’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한은 내부에서는 특정 세대나 투자자를 환율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하려는 취지가 아니라, 해외 투자 흐름이 집단적 유행처럼 확대될 경우 외환 수급과 시장 변동성이 과도하게 쏠릴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 국민연금 ‘큰손’ 된 만큼 역할 변화 주문

한편 이날 이 총재가 해법의 한 축으로 제시한 것은 국민연금이다.

그는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에 나설 때 거시경제 파급 효과를 함께 고려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언급했다.

특히 환 헤지 개시와 중단 시점을 지나치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패를 다 까놓고 게임을 할 필요는 없다”며 신중한 운용을 주문했다.

국민연금의 자금 규모가 커지면서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국민연금 수익률이 원화 기준으로 평가되는 구조 역시 향후 환율 변동과 맞물려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연간 200억달러 수준의 대미 투자 계획이 환율 상승을 부추긴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대미 투자를 원인으로 원화가 장기적으로 절하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외환보유고 운용 역시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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