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이 “소버린 AI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며 국가대표 AI 전략에 힘을 실었다. [사진 = SK 그룹]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소버린 AI(국가 주권형 인공지능)가 국내 산업계의 새로운 핵심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AI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자체 기술력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국가 대표 AI’ 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18일 경기도 이천 SKMS 연구소에서 개막한 ‘제9회 이천포럼’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우리만의 소버린 AI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소버린 AI는 단순히 국내 시장 경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무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며 반도체에 이어 AI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지목했다.
소버린 AI는 국가 차원에서 데이터와 연산 인프라를 직접 확보해 특정 기업이나 해외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AI를 개발·운영하는 전략을 뜻한다.
현재 챗GPT, 구글 제미나이, 앤트로픽 클로드 등 범용 생성형 AI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국내 기업과 정부가 ‘소버린 AI’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기술 자립뿐 아니라 데이터 주권, 국가 안보,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전략적 과제가 자리 잡고 있다.
◇ 정부의 ‘국가대표 AI’ 전략
이재명 정부도 올해 초 '소버린 AI 프로젝트'를 공식화했다.
정부는 ▲네이버 ▲SK텔레콤 ▲LG ▲업스테이지 ▲NC소프트를 핵심 파트너로 선정해 초거대 언어모델(LLM)과 멀티모달 모델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 정예 팀은 향후 6개월마다 경쟁 평가를 거쳐 2027년 상반기까지 최종 2개 컨소시엄으로 압축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각 기업은 고유한 강점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네이버는 국내 최대 포털로서 보유한 방대한 검색 데이터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활용한다. 단순히 텍스트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이미지·음성·영상까지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모달 통합 모델을 개발 중이다.
이는 사용자가 사진을 올리며 “이 제품을 어디서 구매할 수 있나?”라고 질문하면 곧바로 위치 기반 검색과 구매 연결까지 지원하는 형태다.
아울러 ‘AI 에이전트 마켓플레이스’를 구축해 기업·개인이 만든 다양한 AI 도구를 사고팔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도 나서고 있다.
SK텔레콤은 그룹 계열사 SK하이닉스의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앞세운다.
초거대 AI 학습에는 막대한 연산 자원이 필요한데, 자체 반도체 기술을 활용해 AI 칩부터 데이터센터, 모델 개발, 서비스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풀스택 AI’ 전략을 추진 중이다. 칩 생산에서 최종 응용 서비스까지 AI 밸류체인을 통합해 효율성과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LG는 배터리, 화학, 가전 등 제조업 분야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무기로 한다.
공정 현장의 온도·압력·소재 반응 데이터나 배터리 충방전 기록은 해외 빅테크 기업들도 쉽게 확보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LG는 이를 활용해 공정 최적화, 불량률 예측, 신소재 개발에 특화된 AI를 개발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이러한 산업용 AI를 글로벌 기업에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
업스테이지는 의료·법률·금융 등 전문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의료 영상 판독, 판례 분석, 금융 규제 대응 등은 범용 AI가 다루기 어려운 분야인데, 업스테이지는 산업 현장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전문가형 AI’를 지향한다.
NC소프트는 게임 개발을 통해 축적한 스토리텔링 시나리오, 캐릭터 대사, 그래픽, 음성 연기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영화·웹툰·애니메이션·가상인간 제작까지 응용 가능하다.
예컨대 AI가 대본을 작성하고, 캐릭터 목소리를 합성하며, 영상까지 자동으로 제작하는 엔터테인먼트용 AI가 가능하다. 글로벌 문화 콘텐츠 시장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로 평가된다.
◇ 남은 과제는 ‘경제성’
가장 큰 과제는 경제성이다.
초거대 모델을 학습하려면 GPU 수천 장과 수천억 원대의 전력·데이터 확보 비용이 필요하다. 기업들이 산업별 특화 AI를 개발하더라도, 이를 구독형 서비스나 B2B 솔루션으로 연결해 안정적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는 “AI는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르지만, 이를 실제 경제 성과로 연결하려면 초기 투자비용을 상쇄할 충분한 가치 창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산업 맞춤형 AI는 범용 모델보다 정밀할 수 있으나, 구축·유지 비용이 크고 현장 최적화 단계에서 시행착오가 잦다는 점도 부담으로 꼽힌다.
영국의 한 조사에서도 기업들이 평균 32만 파운드(약 5억 원)를 AI 프로젝트에 투입했지만, 실질적 성과를 체감한 비율은 전체의 13%에 불과했다.
결국 산업 특화 AI의 성패는 기술적 완성도를 넘어 비용 대비 효익을 얼마나 빠르고 명확하게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