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분리 완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산업계는 환영, 정치권은 신중론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G7 정상회의를 앞두고 5대 그룹 총수 및 경제6단체 회장들과 만나 통상 위기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모습. [사진 = 대통령실]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반도체 업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 금산분리 완화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독점 폐해가 없는 특수 영역에 한정한다”는 단서를 달며, 규제 완화의 범위와 안전장치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발언은 반도체와 AI 등 초대형 자본이 필요한 산업에서 현행 금산분리 제도가 외부 자금 유입을 가로막고 있다는 업계의 지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업계는 “현실적인 논의가 시작됐다”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 ‘30조 공장 짓자니 규제가 발목’…SK하이닉스의 고민

금산분리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상호 지배와 출자를 제한하는 제도다.

과거 재벌이 금융계열사를 사실상 사금고처럼 이용해 자금을 순환시키거나, IMF 외환위기 당시 복잡한 상호출자 구조가 연쇄 부실을 일으킨 것이 도입 배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제도가 반도체처럼 수십조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설비투자 산업에서, 자금 조달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반도체 경기 침체로 7조730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그러나 AI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2024년 23조4673억원의 흑자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투자 여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HBM은 일반 메모리보다 웨이퍼 사용량과 공정 복잡도가 높다. 공장 한 기당 최소 30조원 이상이 필요한 고비용 산업이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SK는 외부 자금을 모아 반도체 투자 펀드 조성을 검토했으나, 현행 금산분리 규제상 산업자본은 직접 운용사(GP) 역할을 맡을 수 없다.

또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제도 역시 활용에 한계가 있다.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가 CVC를 설립하려면 지분 100% 보유가 의무이며, 외부 출자자는 펀드 총액의 40%까지만 허용된다.

예를 들어 30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할 경우 외부 자금은 12조원, 나머지 18조원은 그룹 내부 자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해외투자 비중도 자산의 20% 이내로 제한돼, 미국과 중국 등 해외 공장 투자에도 제약이 따른다.

◇ 제조업 강국일수록 금산분리 완화…해외는 융통성 높여

금산분리는 한국만의 이슈가 아니다.

해외 주요국 역시 산업 구조와 금융 시스템에 맞춰 제도를 운용해왔다.

미국은 1933년 제정된 글래스-스티걸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했다. 대공황 당시 은행의 투기가 금융위기를 악화시킨 데 따른 조치다.

이후 1999년 그램-리치-블라일리법이 제정되면서 은행·증권·보험 간 내부 융합이 허용됐으나, 은행이 제조업을 직접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돼 있다.

금융 산업의 비중이 큰 미국은, 금융의 산업 진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은 유니버설 뱅킹 체제를 유지해왔다.

은행이 기업 지분을 보유하고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으며, 기업과의 장기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관계형 금융 모델을 발전시켰다.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진 유럽 주요국들은, 대규모 설비투자와 기술개발을 위해 산업과 금융의 긴밀한 협력을 필수 요소로 보고 있다.

일본은 절충형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과거 재벌체제 아래에서 은행·무역상사·제조기업이 상호출자로 연결됐으며, 현재도 금융청 감독 아래 산업과 금융의 협력이 부분적으로 허용된다.

◇ 산업계 "투자 확대 기회"…은행권 "신중 접근"

산업계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반도체와 AI 같은 전략 산업은 조 단위 자금 조달 능력이 곧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직접 펀드 운용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해외 투자자 유치가 빨라지고, 국내 설비 확충 속도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은행권은 공식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이다.

금산분리가 완화될 경우 산업자본이 금융 기능을 흡수해, 기존 은행의 신용 공급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재벌의 사금고화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도 여전하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계산이 복잡하다.

은행이 산업 펀드의 출자자로 참여해 투자은행(IB) 사업이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부문을 확대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은행 내부 전략 보고서에서도, 금산분리 완화가 오히려 신사업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 입장은 신중하지만, 조건부 완화가 해외 투자 유치나 대체투자 시장 확대 등 새로운 수익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실론이 공존한다.

◇ 정치권은 균형점 모색…전문가 "단계적 완화가 현실적"

정부와 정치권도 균형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은 금산분리 원칙을 당 강령에 명시하고 있어, 완화 논의가 대기업 특혜로 비칠 가능성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반면 여당 내부에서는 AI와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 한정한 한시적·부분 완화 방안을 검토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현재 국회에는 지주회사의 CVC 규제 완화 관련 법안이 다수 계류 중이며, 정치권은 산업 경쟁력 강화와 금융 안정성 사이에서 제도 조정의 폭과 속도를 놓고 신중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면적 폐지보다는 조건부·단계적 완화가 현실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보고서 《바람직한 금산분리제도 재정립방안》에서, 금융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제도 개선이 가능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이해상충 방지와 지배구조 강화, 감독·공시 체계 보완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또 산업자본의 금융 진입을 허용하더라도, 지배권 제한과 차등 규제 등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설계가 미흡할 경우 금융 건전성 훼손과 사금고화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대로 또 다른 전문가는, 완화를 지나치게 미루면 글로벌 투자 경쟁력 약화와 산업 성장 둔화가 불가피하다며 한국의 핵심 전략 산업이 자금 조달 문제로 뒤처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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