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 기자] 구글과 애플이 한국 정부에 1/5,000 축척 정밀지도(고정밀 수치지도) 반출을 다시 요청하면서, 지도 데이터의 해외 이전을 둘러싼 논쟁이 9년 만에 재점화됐다.
두 기업은 자율주행·AR 내비게이션·AI 기반 길찾기 등 첨단 서비스 구현에 필수적인 고정밀 공간정보를 확보해야 한다며, 반출 제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일 발표한 「정밀지도 국외 반출을 둘러싼 갈등, 그 해법은?」 보고서에서, 정밀지도 반출이 단순한 산업 이슈를 넘어 국가안보·정보주권·디지털 통상이 교차하는 복합 쟁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정부는 국가안보와 정보주권을 이유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지만,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의 규제를 ‘디지털 무역장벽’으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밀지도 반출 문제는 단순한 산업 규제 논의를 넘어, 국제 통상 질서와 정보 주권이 교차하는 외교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다.
◇ 통상 이슈로 번진 정밀지도 반출 논의
구글은 올해 2월 한국 전역의 정밀지도 반출을 신청했으며, 6월에는 애플이 동일한 요청을 제출했다.
이는 2007년과 2016년에 이어 세 번째 시도로, 앞선 신청은 모두 국가안보 우려로 불허됐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다르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공간정보 규제를 비관세장벽으로 공식 지정하면서, 문제가 양국 간 통상 테이블에 올라온 것이다.
구글은 “복잡한 도시 지형에서 차선·보행로·신호체계까지 인식하는 정밀지도 기반의 AI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해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현재 한국에서 구글 지도는 단순 길찾기 수준에 그치며, 보행자 내비게이션·3D 매핑·AR 안내 등 고정밀 기능은 사용할 수 없다.
애플도 자율주행·공간 컴퓨팅 기술 고도화를 위해 정확한 좌표·건물 윤곽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국내 업계는 “외국 기업이 한국의 공간정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면 국내 산업 생태계와 정보주권이 동시에 약화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국토지리정보원은 2020~2024년 동안 정밀지도 구축에만 약 1,545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따라서 이를 해외로 무상 제공하는 것은 국가 데이터 자산의 외부 유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 복잡한 허가 구조, 기준은 여전히 불투명
정밀지도를 해외로 반출하려면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공간정보관리법)에 따라 국토교통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법에 따라 군사시설이나 발전소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정보가 포함된 지도는 원칙적으로 국외 반출이 금지된다. 또한 반출이 필요한 경우에도 보안성 검토와 관계 부처 협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허가 여부는 국토지리정보원 내 ‘측량성과 국외반출 협의체’가 심의한다.
이 협의체에는 국방부·과기정통부·외교부·산업부·행안부 등 8개 부처의 담당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가 참여해 보안·통상·산업 측면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그러나 현재는 법령에 구체적인 허가 기준이 명시돼 있지 않아, 신청이 있을 때마다 ‘허용이냐 불허냐’를 둘러싼 논쟁이 되풀이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에 대해 “지금처럼 행정 재량에 의존하는 심의 구조로는 산업계·정부·시민사회 간 갈등을 해소하기 어렵다”며, 보안 처리 수준·국내 서버 구축·사후관리 요건 등 허가 기준을 법령이나 시행령에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 정부 “국내 서버 관리 없이는 통제 불가”
정부가 내세우는 핵심 원칙은 ‘국내 서버 보관 및 통제권 유지’다.
정밀지도 원본에는 발전소·송유관·군사시설·통신선로 등 국가 기반시설의 세부 좌표가 포함되어 있어, 데이터가 해외로 이전되면 보안사고 시 정부가 즉각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위성영상이나 상업용 위성지도를 결합할 경우, 보안시설의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어 “국가안보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또한 국내 서버 보관은 법적·세무적 통제권 확보를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서버를 해외에 두면 한국의 공간정보관리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적용이 어렵고, 기업의 매출이나 로열티 과세가 불가능해진다.
정부는 이를 ‘세금 없는 공공자산 이용 구조’로 보고 있다.
반면 구글과 애플은 서버를 각국에 분리할 경우 실시간 데이터 업데이트 효율이 떨어지고, 각 국가의 규제를 모두 따르기 어려워진다고 주장한다.
특히 서버를 국내에 둘 경우 한국 내 고정사업장(PE)으로 분류돼 세금 및 규제 부담이 커질 수 있어, 이를 꺼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 경제적 파급효과, “순손실 100조원 이상”
정밀지도 반출의 경제적 영향을 처음 정량화한 기관은 국토지리정보원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은 2021년 「측량성과 국외 반출 환경 및 영향분석 연구」를 통해, 한국은행 산업연관표(2018 기준)를 기반으로 산업별 유발계수를 적용한 투입산출모형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반출이 허용될 경우 국내 산업의 수익 감소와 기술 종속도를 가정해 경제적 손실을 산출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분석에 따르면 정밀지도 반출이 허용될 경우, 국내 산업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 파급효과가 긍정적 효과를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산유발효과 측면에서는 국내 산업의 생산 감소 규모가 약 100조7000억원에 달하는 반면, 관광 활성화 등 일부 긍정 요인은 약 4조원 수준에 그쳤다.
고용유발효과에서도 정밀지도 반출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62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으며, 관광 분야 등에서 새로 생기는 고용은 3만명가량에 불과했다.
또한 부가가치유발효과 역시 국내 경제 손실이 약 83조원, 긍정적 효과는 3조원 수준으로 분석돼, 지도 반출이 가져올 경제적 순손실이 단기 편익보다 훨씬 크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이 연구는 관광산업에서 외국인 편의 증대로 일부 긍정 효과가 발생하더라도, 자율주행·스마트물류·O2O 서비스·간편결제 등 국내 데이터 기반 산업 전반에서는 부정적 파급효과가 압도적이라고 분석했다.
즉, 지도 반출은 단기 관광 편익보다 산업 생태계의 장기적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다.
◇ 입법조사처 “조건부 허가 기준, 법령에 명시해야”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정밀지도 반출은 단순한 기업 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통상·산업정책이 교차하는 복합 사안”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허가할지 말지’의 논쟁을 넘어서, ‘어떤 조건에서 허가할 것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제언이다.
보고서는 △보안시설 블러 처리 및 좌표 삭제 △국내 서버 보관 △사후관리 및 감사 체계 마련 등 기존에 논의된 원칙을 법률 또는 하위 시행령 수준에서 구체화하고, 이를 토대로 기업이 예측 가능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 협의체는 국토지리정보원장이 주재하고 과장급 위원으로 구성돼 있어, 국가 안보 및 통상 이슈를 다루기엔 권한이 제한적이다.
이에 따라 협의체의 위상을 차관급 위원회로 격상하고, 국무총리 소속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국가의 공간정보가 글로벌 기술·통상 질서의 한 축이 되고 있다”며 “국내 법제와 산업계가 이를 관리할 제도적 기반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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