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자유무역협정(FTA) 개선협상 타결 서명식에서 크리스 브라이언트 영국 산업통상부 통상담당장관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악수하고 있다. 여 본부장은 1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브라이언트 장관과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사진 = 산업통상자원부]
[이코노미 트리뷴 = 김용현·이진석 기자] 1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한국과 영국이 2년여간 진행해온 한·영 자유무역협정(FTA) 개선협상을 최종 타결했다.
이번 협상은 단순한 관세 조정을 넘어 전기차와 K-푸드 디지털 콘텐츠 인공지능(AI) 공급망 협력 등 양국의 핵심 산업을 직접 겨냥했다는 점에서 ‘산업 맞춤형 통상 패키지’로 평가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크리스 브라이언트 영국 산업통상부 통상담당 장관이 한·영 FTA 개선협상 타결을 선언하고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양국은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이후 교역과 투자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2021년 한·영 FTA를 발효했으며, 협정 발효 후 2년 내 후속 협상을 추진하기로 한 조항에 따라 지난해 초부터 개선협상을 이어왔다.
기아 EV3가 ‘2025 영국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소형 크로스오버 부문 수상에 이어 최종 심사에서 경쟁 모델들을 제치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으며, 기아는 EV9에 이어 2년 연속 전용 전기차로 수상 기록을 세웠다. [사진 = 현대자동차]
이번 협상의 핵심 성과는 자동차 원산지 기준 완화다.
한국의 대영 수출 가운데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자동차는 기존에 부가가치 55% 이상을 충족해야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협상으로 해당 기준이 25%로 대폭 낮아졌다.
전기차 배터리에 투입되는 리튬과 흑연 등 핵심 광물의 상당 부분이 제3국에서 조달되는 산업 구조를 감안하면, 업계에서는 이번 기준 완화를 한국 전기차 수출의 구조적 걸림돌을 해소한 조치로 평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완성차를 비롯해 배터리와 전장 부품 기업의 대영 수출 여건도 전반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CJ올리브영 부스를 찾은 관람객들. K-뷰티 대표 플랫폼인 올리브영은 최근 구직자 대상 조사에서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로 꼽혔다. [사진 = CJ올리브영]
K-푸드와 K-뷰티도 원산지 규제 완화의 직접적인 수혜 대상이다.
만두·떡볶이·김밥·김치 등 가공식품은 그동안 주요 원재료를 역내산으로 사용해야 무관세가 적용됐지만, 이번 협상으로 해당 요건이 삭제됐다.
글로벌 원료를 활용하더라도 국내에서 최종 생산하면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K-푸드의 영국 시장 진출 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화장품 등 화학제품 역시 원료 출처보다 혼합·정제·배합 등 핵심 공정이 어디에서 이뤄졌는지를 기준으로 삼도록 바뀌어, ODM 중심의 K-뷰티 산업 구조가 반영됐다는 평가다.
정부조달 분야에서는 영국이 고속철도 시장을 추가 개방했다.
기존에는 한국만 일방적으로 조달시장을 개방해온 구조였으나, 이번 협상으로 불균형이 해소됐다.
이는 영국 철도 인프라 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 여지를 넓히는 동시에, 영국 입장에서도 해외 자본과 기술을 유치해 사업비 부담과 지연 리스크를 줄이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PUBG와 프랑스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콜라보레이션 이미지. 명품 패션과 게임 IP의 결합을 통해 가상 공간을 새로운 브랜드 경험의 장으로 확장했다. [사진 = 크래프톤]
서비스 분야에서는 온라인 게임 시장이 추가 개방됐고, AI 등 신기술 기반 신서비스도 협정 범위에 포함됐다.
게임과 디지털 콘텐츠는 이미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 산업으로, 이번 협상을 통해 유럽 진출 과정에서의 규제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디지털 규범 측면에서는 국경 간 데이터 이전 자유화, 데이터·컴퓨팅 설비 현지화 요구 금지, 소스코드 제출 요구 금지, 온라인 소비자 보호 규범 등이 도입됐다.
브렉시트 이후 디지털·AI 규범 설계국을 지향하는 영국과 플랫폼·AI 산업 확장을 추진하는 한국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다.
비자 제도 개선도 눈에 띄는 변화다.
영국 내 제조공장 설립 초기 단계에서 한국 엔지니어와 설비 유지·보수 인력의 입국이 한층 수월해졌고, 영어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비자 유형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협력업체 인력까지 서비스 계약을 통해 영국으로 초청할 수 있어, 해외 생산거점 구축 과정에서 반복돼온 인력 리스크를 제도적으로 줄였다는 평가다.
바이오와 IT 분야 전문 인력의 입국·체류 요건 역시 간소화된다.
이번 협상에서는 공급망 협력도 제도화됐다.
희토류, 배터리, 의약품 등 핵심 품목을 대상으로 공급망 협력 챕터가 신설됐으며, 공급망 교란 발생 시 양국은 핫라인을 통해 10일 내 긴급회의를 열고 대체 공급처 정보 공유와 신속 수출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미국이 전략자원 확보를 이유로 핵심 제련·가공 설비의 현지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흐름과 유사하게, 영국 역시 통상 협정의 범위를 공급망과 안보까지 넓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HS2 핵심 거점인 올드 오크 커먼 역. 이번 한·영 FTA 개선협상으로 영국 고속철 조달 시장이 개방되며 인프라 협력 확대가 기대된다. [사진 = 네트워크 레일(Network Rail)]
영국 역시 이번 협상을 통해 실질적인 이익을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기차와 가공식품 수입 확대를 통한 소비자 선택권 확대와 물가 안정 효과, 고속철 등 인프라 사업에서의 해외 자본 유치, 디지털·AI 규범을 FTA에 반영해 글로벌 표준 확산을 노리는 전략적 목적이 동시에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영국 입장에서는 런던과 주요 도시를 잇는 국가 핵심 고속철도 사업인 HS2(High Speed 2) 등 대형 철도·교통 인프라 프로젝트에 해외 제조사와 자본을 유치해 사업비 부담과 공사 지연 리스크를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유통·리테일 기업을 중심으로 전기차와 K-푸드·K-뷰티 상품의 선택 폭을 넓혀 소비 시장 경쟁을 촉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디지털·게임·플랫폼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의 진출 확대가 현지 퍼블리싱·마케팅·데이터 서비스 산업의 일감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협상 타결은 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통상 환경에서 자유시장 질서를 공고히 하고, 영국과의 경제협력 관계를 산업 전반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법률 검토와 국회 비준 등 협정 발효 절차를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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